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석가탄신일에 아주머니가 아기를 보아준다고 하셔서 때아닌 휴가를 맞은 우리 부부는 오랜 만에 홍대에 가서 목마른 문화생활을 실컷 즐겨보기로 하였다. 선택한 영화는 상상마당에 걸려있던 인권 옴니버스 영화 '시선 너머'- 석가탄신일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.
첫 영화, <이빨 두 개>는 <사과>의 강이관 감독 작품이다. 탈북자에 대한 '시선'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자칫 정치의 무게에 짓눌릴 수 있는 이 문제를 아이들의 일상으로 끌어 들인다. '아이들 끼리 놀다가 다친 사건'에 대한 탈북자 부모와 주인공 부모의 엇갈리는 관점, 그리고 돈에 대한, 우리가 '상식'이라 믿었던, 그들에겐 '상식'이 아닌 일들.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딱 그 만큼의 사람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편견을 슬며시 보여줄 때 느껴지는 불편함이 바로 우리의 인권감수성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. 전작에서도 그러했지만 한국 가족의 묘사에 대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은 이번에도 그 능력을 어김없이 발휘했고 중학교 일상을 그려내는 무수한 디테일들이 무척 탁월하다. 봉준호 감독을 '봉테일'이라 부른다지만 나에게는 이제 강이관 감독도 '강테일'이다.
다음 영화, <니마>는 <지금 이대로가 좋아요>를 만든 부지영 감독의 작품이다. 모텔 청소일을 하는 몽고 여자 니마가 한국인 정은과 짝이 되어 일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. 정은이 불편함으로 시작한 이 어색한 관계는 남자에게 구타당하는 여자 손님을 함께 구하려 할 때 서로 교감을 이룬다. 그들은 국적을 넘어 '여자'이고 또 '엄마'이다. 세심하게 그려내는 그녀들의 팍팍한 일상과 그 안의 관계가 누구나 갖고 있는 벽을 보여주지만 또 그 벽을 넘어서는 과정도 보여준다. 전작도 그랬지만, 여성 감독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미덕들을 잘 살려내는 감독이다.
세번 째 영화 <백문백답>은 <번지점프를 하다>의 김대승 감독 작품이다. 김현주 등의 가장 지명도 높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는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. 여자 직장인 관객으로서 이 문제는 무척 예민하게 다가오는 데, 그만큼 잘 풀어내기 쉽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. CCTV와 개인 신용정보에 대해 권력을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피해자 희주가 피해자가 아닌 양 그려지는 이 상황은 모두가 갖고 있는 직장 내 성폭행에 대한 공포의 근원이다. 그러나 그 상황을 깊숙하게 파고드는 느낌은 조금 아쉬운 작품이었다. 알고 있는 문제를 알고 있는 선에서 그리는 데 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.
다섯 편 가운데 가장 흥행성이 높았던 <바나나 쉐이크>는 <파수꾼>의 윤성현 감독 작품으로, 유일하게 내가 그 감독의 첫 작품으로 접하게 된 에피소드이다. 이삿짐 센터의 필리핀 이주노동자 알빈과 한국 노동자 봉주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코메디의 틀을 가져온다. 이주노동자에 대해 갖고 있는 일상적인 경계심과 편견을 이사 과정의 도난 사건으로 드러내는 이 작품은 그 편견의 정도가 딱 교양있는 중산층 시민이 가질 법한 수준의 은근한 것이다. 그 와중에 동료인 봉주가 알빈을 옹호하는 듯 이용하고 이용하는 듯 친구가 된다. 그러나 이런 편견은 가벼운 코메디와 속고 속이는 배신의 플롯 안에서 재미나게 묘사되고, 특히 알빈과 봉주 역을 맡은 두 배우의 호연이 빛이 난다. 이야기와 연기를 잘 다루고, 특히 장르를 잘 가지고 노는 연출력이다. 시놉만으로는 별 흥미가 없었던 <파수꾼>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.
마지막 영화 <진실을 위하여>는 <반두비>의 신동일 감독 작품이다. 개인적으로는 영문 제목인 <Herstory taking>이 더 와닿았다. 유산의 위기로 입원하는 임산부, 그리고 실업자인 그녀의 남편 인권. 병원에서 인권은 중요한 돈이 들어있던 가방을 도난 당하고, 그 와중에 아내 보정은 유산하고 만다.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이 상황들로 적잖이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데 영화는 어느 한편만 가혹하게 몰아부치지 않는다. 청소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보정의 엄마가 CCTV로 감시를 당하는 상황과 인권이 가방을 도난당하는 상황의 CCTV가 맞물리고, 실업자인 인권과 도난을 한 비정규직 간호사가 맞물리고 의료 사고 과정에서의 개인 정보와 인권의 문제가 제기되고 인터넷을 통한 '진실' 공방이 병원과 보정에게 양날의 칼이 된다. 날카로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가볍지 않게, 그러나 어느 한 편 치우치지 않게 절묘하게 엮인 이 영화는 단연 이 전체의 대미를 장식할 만하다. 타협 없는 신랄함은 신동일 감독의 전작들에서 느낄 수 있는 뚝심과 닿아 있고 여러 가지 문제를 무리 없이 지적으로 엮어 낸 솜씨 역시 탁월하다. 번잡하지 않게, 양날의 칼이 되는, 평범한 일상 속에 지뢰 처럼 널려있는 일상의 인권 문제들을 툭툭 건드리고 지난다.
어찌 보면 이 옴니버스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은 바로 그 '일상 속의 인권'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. 우리는 이미 전쟁과 정치, 폭력과 범죄, 인종과 종교 같은 무겁고 버거운 인권 문제들을 접해왔다. 그리고, 안타깝게도, 조금은 그런 것들에 무뎌져오기도 했다. 이 영화는 그런 무거운 문제의 시초가 될 수 있는, 혹은 사실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평범한 생활인들의 인권 감수성의 현주소를 보여준다. 당신이 혹은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갖고 있는 사소한 편견이 사실 어떤 상황에서는, 어떤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그 지점.
그 소중한 각성이 이 영화를 봐야만하는 이유이다.